삼각구도는 안정적이다? 엉터리 구도 공부에 대해- 데버러 럽턴의 '감정적 자아'
사진을 배우다 보면, ‘구도’라는 말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
미술에서 구도라는 말은 음악에서 리듬이라는 말만큼 애매한 말이다.
부분들의 ‘짜임새’라고 이해하면 쉬울 수도 있지만,
이 단어는 가끔 ‘조화롭게 배치하는 수단’ (위키피디아)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수단으로서 구도의 예는 바로 ‘삼각구도는 안정적이다.’ ‘대각선 구도는 동적이다’ 같은 문장들이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문장들이 의심스러웠다.
여러 가지 기하학적 도형들 아래 구도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그렇게 느껴진다고 결정된 감정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 구도 표를 사용하는 방법 중 대부분은 이런 식일 것이다.
일본인 작가가 저술한 사진교본에는 ‘ 벚꽃을 찍을 때는 생동감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
방사형 구도로 촬영해야한다.’라는 식으로 적혀있었다.
마찬가지로 다른 구도들을 사용하자면, ‘불안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역삼각형 구도를 사용해야한다.’,
‘엄숙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수직구도를 사용해야한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한다.
여러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지만,
나의 첫번째 질문은 ‘내가 느낀 감정을 이 방법으로 사진에 옮기면
정말 보는 사람도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이고,
두번째 질문은 ‘그럼 이 도표에 없는 감정은 어떻게 표현해야하지?’ 이다.
세상의 느낌을 표현하기에 이 도표가 다루는 감정들은 너무 빈약하지 않나?
‘감정’에 대해 공부해보면 어떨까?
보스톡의 편집동인이자 ‘감정사회학자’ 김신식 선생의 강의를 통해서,
또 데버러 럽턴의 책 한권을 통해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럽턴의 책은 ‘감정적 자아 - 나의 감정은 사회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로 1996년에 발간된 것이다.
저자는 ‘감정은 여전히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채로 남아있다.’고 말한다.
‘담론, 육체, 기억, 개인적 전기, 사회문화적 과정, 사상의 복잡한 상호관계 때문’이다.
이러한 상호관계 상태의 변화로 인해, 감정의 정의는 항상 변화할 수밖에 없다.
럽턴은 책의 앞부분에 감정에 대한 연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왔는지 정리한다.
감정을 정의하는 방법, 감정을 다루는 방법이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이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생각이다.
다윈의 감정이론에 바탕이 된 생각인데,
다윈은 하등동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는 감정표현의 연속성을 연구했다.
감정은 모든 동물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었다.
신경생리학적 접근방식도 본능적 감정을 전제한다.
예를 들면, 남성과 여성 뇌를 영상기법으로 촬영 비교하여,
남성 여성의 감정표현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연구하는 식이다.
남성과 여성의 감정 표현이 선천적으로 타고 났다고 가정한 것이다.
조금 더 진행된 연구들에서는 감정을 느끼는 방식,
감정 표현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한다.
감정사회학의 지배적 관점 중 하나인 구조주의적 연구가 그중 하나인데,
구조주의는 보편적인 생물학적 토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약한’ 사회구성주의라 할 수 있다.
에밀 뒤르켐은 사회적‘ 의례에서 감정이 창출되고
다시 그러한 감정이 사회적 유대를 한층 강화하여 집합적 연대를 산출하는 데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혹실드는 감정관리가 점점 상업화된다고 말한다.
감정노동자가 증가하는 요즘의 경제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항공사의 객실승무원을 예로 드는데, 이들은 실제 감정 억누르도록 요구받는다.
항공사의 정책 때문에 점점 실제 감정과 실제 자아로부터 점점 소외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구조주의적 관점이다.
한데, 여기에는 보다 진실한 진정한 자아가 존재한다는 관념이 깔려 있고,
일부는 감정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다소 정형화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경향 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연구자들은 수학적 통계학적 방법을 이용한다.
행위자가 감정규칙에 의해 수동적으로 틀 지어지는 것으로 제시되는 것도 문제다.
주체적 행위능력에 대한 인식이 구조주의 관점에는 거의 없다.
감정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은 자아와 주체성에 관심을 갖는다.
사르트르는 ‘감정은 개인이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인지적 평가이자 도덕적 판단’이라고 했다.
현상학적 접근에서는 메를로 퐁티 철학의 핵심인 ‘세계 내 존재’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덴진은 ‘자아감정이 감정경험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며 ‘
그 사람의 감정의 원천인 살아온 몸에 대한 그 사람의 인식을 무시한 채...’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 ‘사람은 암시적인 또는 상상된 타자의 존재 없이 감정을 경험할 수 없다’라고 상호주관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런 현상학적 접근은 구조주의와 비슷하지만 일부 감정을 생득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강한’ 사회구성주의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소개되는 것은 후기구조주의적 관점이다.
후기구조주의 이론에 따라 ‘담론’ 즉 ‘공유하는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언어가 감정을 구성하는 역할에 중점을 둔다.
후기구조주의자들에게 담론은 현실, 정체성, 사회제도, 관행을 기술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는 진짜 자아, 거짓 자아 같은 것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관념이 ‘문화적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 양자는 분리될 수 없다.
웨더럴은 ‘열정과 낭만적 사랑같은 불가항력적인 감정으로 인식되는 것의 경우에조차,
경험과 느낌은 불가피하게 서사와 언어를 통해 확인되고 분류되고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은 전해들은 것이고,
이미 회자되고 있고, 이미 친숙하고, 사용되기를 기다리며 이미 거기에 존재한다.
잭슨도 마찬가지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열정을 이해하고 묘사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다량의 소설, 연극, 영화, 노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 여성은 남성을 감정문맹이라고 생각하는데,
여성이 남성보다 감정을 더 잘 독해할 수 있는 선천적인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감정에 대한 정신역학적 관점이 소개된다.
여기서는 무의식이 등장한다.
‘구조주의적 분석과 후기구조주의적 분석 모두는 인간주체를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 제시한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정신분석학, 정신역학적 관점이 감정적 자아의 무의식 차원을 이해하는 데 가치 있는 통찰 제공한다.’
정신역학적 관점은 감정의 출처가 항상 의식적으로 확인될 수 없다는 점과
감정상태가 결코 담론을 통해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또, 개인의 주체성을 다중적이고 모순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을 제공한다.
여기에 더해 저자인 럽턴은 ‘몸 되돌려 놓기’를 주장한다.
‘ 나는 감정경험을 구성하는 데서 담론이 수행하는 불가결한 역할을 인정하지만,
감정에서 우리의 피와 살-몸-이 수행하는 역할을 무시함으로써
극단적인 상대주의적 입장으로까지 나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
자아관념은 불가피하게 육체화와 뒤얽혀있다. 육체화는 주체성과 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생득적인 본능적인 범문화적으로 보는 견해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 육체화에 대한 나의 관점은 인간의 몸 자체가 단지 ‘자연적’ 산물인 것은 아니라고 가정한다. ...
우리의 육체화 경험을 항상 사회문화적 과정을 통해 구성되고 그것에 의해 매개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이 웃을 수 있는 해부학적 근육을 얼굴에 가지고 있지만,
웃음에 대한 맥락과 해석은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틀지어진다는 것이다.
신체 감각은 감정 상태를 만들어내는 데 극히 중요하다.
로다웨이는 ‘후각은 장소와 공간관계에 대한 감각의 지리학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증오 고통 즐거움 등 감정의 지리학도 제공‘한다고 했는데,
이런 관점은 사물이나 장소, 공간을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생각해보게 해준다.
그리고, 이 글이 시작하게 되었던 질문에 답이라고 할만한 내용이 나온다.
‘ 따라서 감정은 때로는 경험의 인지적 차원과 육체화된 차원 사이에,
즉 적절한 단어가 없는 종류의 ‘공간’에 자리하기도 한다.
(여기서 다시 언어는 감정 경험을 표현하는 임무에 적합하지 않음이 입증된다.)‘
즉, 감정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언어와 언어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후의 장들에서 몸이, 사물이, 장소가 감정과 어떻게 연결되는 지 설명한다.
아마도 몸, 사물, 장소를 사진의 소재로 삼으려는 사진가들에게 꽤 앞선 생각 거리를 제공해줄 수 있을 듯하다.
삼각구도, 대각선구도 들에 대해서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것들은 엉터리다.
차라리 데버러 럽턴이 이야기한 ‘ 어떤 감정은 적절한 단어가 없는 종류의 공간에 자리한다.’는 말을 되세겨 보자.
사진은 언제나 그러한 언어의 부족한 부분에 대안으로 등장해왔다.
사진은 계속 그런 역할을 해온 것 아닐까. 삼각구도, 대각선 구도가 그런 능력들로부터 우리를 눈 멀게 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출처: https://blog.naver.com/rainmonk/221880944883
구도는 마음속에 있는거라 생각합니다^^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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